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트비히 볼츠만 (문단 편집) == 여담 == 볼츠만은 물질이 공간상에 불연속적이라는 주장, 즉 원자론을 믿었다. 물질이 공간상에 연속적이라는 실재론적 주장이 마흐와 오스트발트 등을 비롯, 당대의 주류였기 때문에, 학문적 충돌이 동료들과 빈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시간의 비대칭성에 대한 주장은 당대에나 현대에나 많은 물리학적, 혹은 철학적 논의를 낳고 있다. 그러나 볼츠만은 그가 스스로 기록하거나 주변인에게 전했던 것처럼 학계에서 배척당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많은 기록을 살펴볼 때, 볼츠만은 격렬한 논쟁을 즐겼다고 한다. 그가 묘사한 '학계의 적대적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게, 학문적으로 대립한 학자들 중 몇몇은 볼츠만과 거의 평생에 걸쳐 교류한 동료들(오스트발트, 로슈미트, 체르멜로)[* 이들과 나눈 논쟁은 과학사에서 볼츠만을 다룰 때 자주 언급된다.]로, 이후에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도 많은 경우 볼츠만이 먼저 공격적인 주장을 던지며 '싸움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자인 파울 에렌페스트도 스승과 비슷한 불운한 생을 살았다. 다만 에렌페스트는 말년에 학문적 의욕을 잃어버리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심지어 막내아들이 [[다운 증후군]] 판정을 받으면서 심각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 당시 독일을 지배하던 나치는 [[T4 작전|독일 내 장애인들을 멸절하겠다는 프로젝트]][* 1933년에는 아직 본격적인 T4 작전이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1930년부터 장애인들을 안락사 혹은 불임시키는 행위를 장려해 왔다고 한다. 당시 나치가 [[인체실험|장애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고려하면, 차라리 고통없이 죽는 게 나은 수준이었다.]를 조금씩 시행하는 중이었고, 그 마수는 에렌페스트의 아들에게도 미쳤다. 결국 1933년에 병원에 입원 중인 아들을 총으로 쏜 뒤, 자신도 따라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는 후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 교수 데이비드 굿스타인의 통계역학 저서 <물질의 상태(States of Matter)>의 서문에 적혀 [[첫 문장이 유명한 작품|화제가 된다.]]] 볼츠만을 동경하여 만나고 싶어했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볼츠만이 자살하자, 그 충격으로 빈 대학교 물리학과를 목표로 공부하던 걸 포기하고 [[베를린 공과대학교]]를 갔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수를 보고 대학을 가는 성향이 있는지, 훗날 수학원리(Principia)를 읽고 그 저자가 강사로 있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트린|트리니티 컬리지]][*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현 [[맨체스터 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맨체스터 과학기술대학교]]의 기계공학과 대학원생이었다.]에 찾아갔다가 [[버트런드 러셀]][* 원래는 공저자이면서 러셀의 스승이자 트리니티 선배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를 만나러 간 건데, 하필 그가 약 반년쯤 전에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교수가 되어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났었기에 못 만났고 그 제자이자 공저자인 러셀을 만난 것이다. 수학원리를 주도적으로 쓴 사람은 화이트헤드이다.]을 만났다. [[분류:빈 출신 인물]][[분류:이학 교수]][[분류: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분류:빈 대학교 출신]][[분류:뮌헨 대학교 재직]][[분류:1844년 출생]][[분류:1906년 사망]][[분류:오스트리아의 자살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